(야구를 몰라도 읽을 수 있는) 야구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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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야구를 증오했다.
부친은 일주일에 6일을 일하는 노가다판의 십장이었다. 퇴근한 후에는 항상 야구를 봤다. 유일하게 쉬는 일요일에는 하루 종일 소파에 누워 리모컨을 독점했다. 야구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만화영화도 드라마도 볼 수 없었다. 나는 야구를 증오했다.
내가 조금씩 야구를 보게 된 계기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이었다. 그때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이 금메달을 땄다. 일본전에서 활약했던 신인 에이스 김광현, 쿠바와의 결승전, 마무리 투수 정대현이 언더핸드를 던지고 곧이어 이어진 고영민의 더블 플레이. 내가 야구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차고 넘쳤다. 그때부터 부친과 종종 야구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부친에 대한 인상은 단순했다. 부친은 내게 납작하리만큼 평면적인 사람이었다. 과묵하고, 툭하면 화를 내고, 화가 나면 내 뺨을 때리고, 자주 때리고, 야구를 보고, 나머지 시간에는 잠만 자는 사람. 잠을 못 자면 화를 내고, 화를 잠으로 푸는 사람. 화와 잠의 고리로 이뤄진 사람. 나는 부친과 유원지나 놀이공원을 가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야구장만 다녔다.
인천 출신인 나는 당연히 SK 와이번스를 응원했고 충청도가 고향인 부친은 한화 이글스의 오랜 팬이었다. 인천 문학경기장에서 와이번스와 이글스가 경기하는 날에는 어김없이 야구장에 갔다. 내가 와이번스 팬이라서 부친과 나는 항상 1루(홈 좌석)에 앉았다. 내가 신이 나 자리에서 일어나 응원을 할 때마다 부친은 자리에 좀 가만히 앉아서 보라고 버럭 역정을 냈다. 그런데 이글스가 점수를 낼 때마다 부친은 와이번스 팬들 사이에서 뻑뻑뻑 박수를 쳤다. 조금 민망했다.
그날도 부친과 함께 야구장에 갔다. 경기 도중 목이 말라 내 가방에서 생수병을 꺼냈는데 생수병에 담뱃가루가 묻어 나왔다. 너 담배 피우냐? 부친이 물었다. 포수 미트에 공이 꽂히는 소리가 내 뺨을 때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부친이 딱 한 마디 했다.
너 그러면 안 된다.
부친은 나를 정죄하는 대신 걱정했다.
그때부터 부친은 부친에서 조금, 아빠가 되었다.
*
그로부터 10년이 넘게 지났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다녔다. 나는 일주일에 5일을 일하는데 부친은 아직도 일주일에 6일을 일했다. 나는 주말마다 하루 종일 잤다. 그제야 나는 왜 부친이 일요일마다 하루 종일 야구만 보고 잠을 잘 수밖에 없는지 몸으로 깨달았다.
내가 다니던 회사에서 야구 티켓을 나눠줬다. 키움 히어로즈와 한화 이글스의 토요일 오후 2시 경기였다. 당연히 부친과 함께 갈 생각이었다. 부친에게 돌아오는 토요일에 꼭 시간을 비워놓으라고 신신당부했다. 부친은 일주일에 6일을 일하지만, 적어도 하루 정도는. 부친은 대답이 없었다. 야구 경기 3일 전 부친에게 다시 물었다. 야구 보러 갈 수 있어? 부친은 아주 심상하게 대답했다.
나가서 일해야지.
딱 하루. 하루도 안 되냐고! 부친은 이제 내 뺨을 때리지 못한다. 그러나 벌컥 화를 내는 성정은 여전했다. 이번에도 빽 소리를 지르며, 그럼 누가 돈 벌어 와? 너 제정신이냐? 나는 퇴사를 앞두고 있었다. 내가 퇴사하면 집에서 돈을 버는 사람은 부친밖에 없었다.
무슨 이 시대의 가장 코스프레도 아니고. 아빠가 뭐 양관식이야? 나도 맞받아치며 빽 소리를 질렀다. 얼마 전부터 부친은 다리를 절었다. 오랜 시간 공사판에서 일을 하다 보니 난청도 생겼다. 야구장 안 가도 되니까 병원이라도 가라고! 안방 문을 쾅 닫고 나왔다. 곧이어 부친은 곯아떨어졌다.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
표 한 장을 이대로 포기하기엔 너무 아까웠다. 부친 대신 야구장에 함께 갈 사람을 구해야 했다. 내 주변에는 축구 팬, 야구를 아예 모르는 사람, 야구 팬이지만 하필 그 토요일에 중요한 일정이 있는 사람들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때 문득, 생각이 난 것이다.
우리 부친과 같은 충청도 출신이라고 했던, 부친과 같은 팀을 응원하는.
이민경.
한 살 어린 대학 동기 민경과는 학교 다니면서 한 마디도 안 해봤다. 노는 무리도 달랐고 수업이 겹친 적도 없었다. 서로 인스타그램만 팔로우해놓은 상태였다. 그마저도 민경이 인스타그램에 잘 접속하지 않아 나는 민경의 근황을 거의 몰랐다. 말을 해본 적이 없으니, 사실은 민경의 목소리도 몰랐다.
다만 민경에 대해 아는 정보가 딱 하나 있었다. 한화 이글스의 팬이라는 것. 민경은 이글스가 승리한 날에 종종 기쁨의 인스타 스토리를 올렸다. 그때 나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민경의 친구로부터 민경의 연락처를 받았다.
야구 표가 한 장 남는데 혹시 같이 야구 보러 갈래?
뒤이어 나는 변명처럼 말들을 주워섬겼다. 절대 부담 갖지 않아도 된다. 마음껏 거절해도 된다. 사실 당연히 민경이 거절할 줄 알았다. 13년 만에 처음 연락한 동기 언니(그것도 학교에서 한 마디도 안 섞어본)가 뜬금없이 단둘이 야구를 보러 가자고 하면. 그런데 돌아온 민경의 답은 의외였다.
와!!!! 언니 저도 데려가주세요.
그러자 이번에는 내 쪽이 걱정되었다. 10년도 넘어서 처음으로 민경과 이야기를 하게 된다면 무슨 얘기부터 해야 할지, 그동안 잘 지냈니. 이렇게 너와 야구를 보러 오게 될 줄은 몰랐다. 인생 정말 모르는 일이다…. 민경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혹시 나랑 같이 야구 보는 게 부담스러우면 따로따로 앉아서 봐도 된다. 절대 ‘부담’ 갖지 말고, 혼자 편하게 봐도 된다. 민경에게 답장이 왔다.
당연히 같이 봐야죠.
*
고척돔 앞에서 13년 만에 만난 민경은 그대로, 조금도 변한 게 없었다. 만두 사느라 조금 늦었어요. 민경이 내 몫의 만두까지 사다 줘서 맛있게 먹었다. 나와 민경은 크림 새우도 먹고, 닭강정도 먹고, 콜라와 맥주도 마셨다. 배를 든든하게 채우고 경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민경이 말했다.
언니 예전에 저한테 편지 써준 거 기억해요?
기억이 났다. 내가 언젠가 민경에게 편지를 쓴 적이 있다는 것. 아마 편지 쓰기를 한창 좋아했던 때 같은데. 그때 무작정 편지를 쓰고 싶어서 인스타그램에 ‘제 편지를 받아보실 분을 구합니다.’ 이런 글을 쓴 것도 같다. 그때 민경이 인스타그램 DM으로 편지를 보내달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민경은 그 편지를 아직도 가지고 있었다. 벽에 붙여놨다고도 했다. 편지의 내용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언니가 썼잖아요. 망원동에 놀러 갔더니 누가 하수구 맨홀 뚜껑 구멍에 노란 꽃을 꽂아놨다고. 그런 일은 어쩐지 이민경 같은 사람이나 할 법한 일이라고. 그렇게 써준 거.
민경은 망원동에 산다.
언니, 근데 그거 거짓말이죠?
아냐, 아냐, 절대 아냐. 진짜 봤어. 꽃이 엄청 커서 구멍에 빠지지 않고 딱 꽂혀 있었어. 정말이야. 아직도 기억해. 사실 내가 정말 그 장면을 본 건지, 아니면 언젠가 본 사진을 실제로 봤다고 착각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그 순간에는 민경에게 그 말을 꼭 해주고 싶었다. 그런 건 이민경 같은 사람이나 할 법한 일이라고. 민경이 웃었다.
경기가 시작되었다.
*
민경은 그날 경기 내내 내게 한화 이글스 응원가를 알려주었다. 나와 민경은 박수치고, 탄식하고, 환호했다. 아, 나는 분명히 SSG 랜더스 팬인데. 그날만큼은 완전히 한화 이글스 팬이 다 되었다. 민경이 박수칠 때마다 부친의 뻑뻑뻑 박수를 떠올렸다. 그날 한화 이글스는 11연승을 했다. 민경은 열기가 가득한 그라운드를 휴대폰 카메라에 계속 담았다. 언니 너무 즐거웠어요. 경기가 끝나고 민경과 헤어졌다. 집에 돌아오는 버스에서 민경의 인스타그램에 들어가보았다. 11연승의 기쁨이 인스타 스토리에 그대로 담겨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거기서 민경과의 연락이 끝날 줄 알았다. 하루 종일 즐겁게 놀았으면 된 거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며칠 뒤 민경에게 연락이 왔다.
언니, 저 언니랑 펜팔 하고 싶어요.
민경은 10년 전 내 편지에 답장을 하고 싶다고 했다.
*
부친은 8회말이 끝나면 어김없이 경기장을 나왔다. 내가 야구는 9회말 2아웃부터라고 아무리 악을 써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8회면 볼 만큼 다 본 거라고, 경기는 끝난 것과 다름없다고. 민경과 야구장에 가서 처음으로 9회말까지 다 보고 나왔다. 아빠, 나 이제 민경이랑 야구 보러 다닐란다. 부친은 여전히 대답 없이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한다. 야구는 9회말 2아웃부터니까. 부친은 다리를 점점 더 절고 텔레비전의 볼륨을 최대로 키우지 않으면 중계를 듣지 못한다. 어쩌면 부친은 매일 야구 경기를 볼 때마다 1982년, 프로야구가 처음으로 개막했던 그때로 돌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젊고, 건강하고, 거칠 것이 없었던 청년. 꿈 같은 것도 있었을지 모른다. 어쩌면 야구 선수가 되고 싶었을지도. 야구는 아빠에게 일기장이자 시계였다.
앞으로 민경과 야구를 함께 볼 날은 아주 많을 것이다. 그러나 민경과 함께 야구를 보러 가도 어쩐지 내 옆에 아빠가 앉아 있다는 착각이 들 것이다. 한화 이글스가 점수를 낼 때마다 뻑뻑뻑 아저씨 박수를 치고 에러를 낼 때마다 저 새끼 새끼 욕을 하는 아빠가. 아빠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아빠 노릇은 나를 야구장에 데려가는 일이었다. 어느덧 아빠는 자신이 지고 있는 수많은 ‘노릇’들을 내려놓을 때가 되었다.
다른 스포츠 경기는 공을 골대에 넣어야 점수가 난다. 그러나 야구는 사람이 집(홈)으로 돌아와야 점수가 난다. 공이 아니라 사람으로 점수를 낸다. 나는 이 이야기를 무척 좋아한다. 결국 내가 야구를 통해 얻은 것은 사람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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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