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꼬무' 오패산 터널 총격 테러사건 범인 성병대, 경악을 부르는 범행·망상 [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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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브이데일리 최하나 기자] '꼬꼬무' 지난 2016년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총격 테러사건을 다뤘다.
12일 밤 방송된 SBS 교양프로그램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아귀의 전쟁 – 2016 서울 총격 테러사건'이라는 주제로 그날 이야기를 전했다.
지난 2016년 헬멧을 쓰고 방탄 조끼를 입은 40대 남성이 거리 한복판에서 노인을 망치로 무참히 가격한 후, 오패산 터널 옆에서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을 향해 총을 난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경찰과 남성 사이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목격자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놀랐다. 총알이 어디로 날아올지 모르니까"라고 그 당시 살벌했던 현장에 대해 증언했다.
경찰이 실탄을 쐈고, 남성은 그 중 2발을 맞았다. 그러나 방탄조끼로 인해 부상은 경미했다. 범인이 경찰에게 온 신경을 쏟고 있는 사이, 범인의 뒤로 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인근에서 술을 마시던 일용직 근로자들이었다. 범인을 제압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시민들과 경찰에게 제압 당한 범인은 극단적 선택을 하려고 했다고 말해 의문을 자아냈다. 이 사람의 이름은 성병대였다. 지난 2001년 특수강간으로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 받은 성범죄자였다. 집행유예가 끝나기 전에 또다시 미성년자 강간으로 징역 5년을 선고 받는 등 무려 전과가 7범에 달했다. 성병대는 형을 마치고 4년이 지난 뒤 2016년 대한민국을 깜짝 놀라게 만든 사건을 벌인 것이었다.
당시 사건 담당 검사는 "그 총기는 어떻게 해서 사건 현장에 가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직접 사제 총기를 제작했고 서울 동대문이나 종로 같은 데 가서 쇠구슬, 화약, 알류미늄관을 구입했다. 그리고 한두 달에 걸쳐서 사제 총 만드는 법을 연구했다. 나무판에 알루미늄관을 덧대서 거기에 쇠구슬하고 화약을 넣어서 발사되게 했다"고 말했다.
검찰 측은 성병대가 제작한 총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성능 시험을 요청했다. 그 결과는 아주 충격적이었다. 38구경 리볼버 권총에 버금가는 성능을 보였다.
성병대는 이런 총기를 모두 17정을 제작했다. 성병대가 메고 있던 가방에서는 사제 총기 외에도 칼 7자루가 나왔다. 여기에 사제 폭탄까지 있었다. 성병대는 각종 무기 외에도 자전거 가게에서 자전거를 구입하고, 서바이벌 게임용 방탄조끼에 도마를 덧대 총격전을 대비했다.
범행을 저지르기 열흘 전 성병기는 SNS에 "내 전재산은 9493원이다. 40대 중반에 실업자에 가낭뱅이. 거기다 국민왕따. 이정도면 실패한 인생의 전형적인 표본이다. 하여간 난 이제 틀렸다. 힘내라는 말도 좀 더 인내하면 좋은 날이 올거라는 말도 나에게는 의미 없음"이라는 글을 올렸다.
지난 2012년 출소 후 성병대는 극심한 경제적 궁핍을 겪고 있었다. 경제적 궁핍의 원인을 모두 경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검사는 "경제적 궁핍의 원인을 찾아보니까 자신을 처음 수사한 의정부경찰서 경찰관들이 자신에게 누명을 씌웠다고 생각하더라"고 했다. 심지어 성병대는 경찰이 자신을 살해할 거라고 망상하기도 했다.
성병대는 SNS에 장문의 소설을 쓰기도 했다. 제목은 '아귀'였다. 소설의 첫 구절은 "오시오는 전자발찌를 부착한 자다. 전자발찌를 부착하였다고 하니 흉악한 성범죄자부터 생각나게 한다. 오시오가 전자발찌를 부착하게 된 경위는 성범죄 유죄 판결에 따른 형 집행과 전자발찌법 소급 적용으로 인해 출소 후 전자발찌를 부착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여느 성범죄자처럼 본다면 유감스러운 일이다"였다. 성병대는 자신을 투영한 소설 속 주인공을 통해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또한 성병대는 오가면서 만난 경찰들의 모습을 촬영한 영상을 SNS에 올리기도 했다. 더불어 경찰에 대한 악의적인 감정을 스스럼 없이 드러내기도 했다.

2016년 10월 19일 성병대는 헬멧과 방탄 조끼를 착용하고 집을 나섰다. 골목에 숨어 부동산 주인이 퇴근하기를 기다렸다. 저녁 6시 20분 부동산 주인이 가게를 나와 집으로 향했다. 성병대는 그 뒤를 조용히 따라붙었다. 총기를 꺼내 들고 심지에 불을 붙였다. 그렇게 그날의 총격 사건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날 총기 사건을 막기 위해 거리를 나섰던 이대범 씨는 경찰 표창을 받았다. 자랑스런 기억이 아니라 가슴 아픈 기억으로 남았다. 이대범 씨는 "경찰관 분이 돌아가실 거라는 생각은 못했다. 운이 없었으면 제가 맞을 수도 있었다. 되게 혼란스러웠다. 이틀 동안 잠을 못 잤다. 그 분이랑 저랑 마지막 대화를 했으니까"라고 토로했다.
해당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경찰은 김창호 경위였다. 김 경위는 27년 간 근무하면서 24번이나 표창을 받은 모범 경찰이자 한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이었다. 범인은 방탄 조끼를 입고 있었지만, 그날 김경위는 눈에 잘 뛰는 야광 조끼를 입고 있었다. 그 결과 범인은 총 두발을 맞고도 멀쩡했지만, 김경위는 목숨을 잃었다.
또 다른 피해자도 있었다. 성병대에게 비밀 경찰로 오해 받았던 부동산 주인이었다. 망치로 다섯 차례 가격 당한 부동산 주인은 머리에 큰 부상을 입었다. 생명에 지장은 없었다. 그러나 빗나간 총알에 맞은 행인이 있었지만 다행히 빚맞았다.
이대범 씨는 "그 일이 있고 나서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이런 일이 정말 무서운 일이라는 걸 갖게 됐다"고 말했다.
사건 발생 1주일 후 성병대의 사건 현장 검증이 있던 날이었다. 인원 통제를 위해 70명이 넘는 경찰들이 동원됐다. 성병대는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더이상 속지 마라"며 외쳤다. 당당한 태도로 상황을 재연하기도 했다. 또한 범행 동기를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이건 혁명입니다! 혁명"이라고 말했다.
또한 성병대는 사망한 김경위에 대해 "경찰은 번동 병원에서 사망했다. 그분은 링거 주사제 치료 과정에서 독살됏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 알아봐 주셨으면 좋겠다"는 궤변을 늘어놓기도 했다. 더불어 유족들에게 "그분이 어떤 분인지 사실 저는 분명히 모르겠다. 근데 경찰 조직에서 죽인 걸로 봐서는 나쁜 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해 경악케 했다.
성병대는 조사 과정에서 심리 검사를 모두 거부했다. 만약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결과가 나온다면 경찰에 의해 억울한 누명을 썼다는 자신의 주장이 인정받지 못할까봐 우려한 것이다.
전문가는 성병대의 인지 기능은 온전하게 유지되고 일부 망상이 있지만 상황 판단에는 문제가 없으며, 범행을 치밀하게 계획하고 실행에 옮길 수 잇기 때문에 범죄 성립에는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재범 위험성이 극히 높다고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검찰은 살인, 살인 미수 등 6개의 죄목으로 기소했다. 그러자 성병대는 국민참여재판을 요청했다. 1심 재판은 국민참여재판으로 열리게 됐다. 증인석에 오른 이대범 씨는 당황스러운 일을 겪었다. 이대범 씨는 "보통 변호인이 질문을 하는데, 성병대가 질문을 하더라. 물어보는데 너무 당당하게 물어봤던 것 같다. 자기가 지금 어디 구렁텅이에 빠진 사람처럼 '다 조작된 것 같다. 누구랑 짠 거 아니냐'라고 질문하는데 화가 나더라. 반성하는 기미가 전혀 없었던 것 같다"고 당시 상황에 대해 전했다.
성병대는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호하는데 나섰다. 당시 사건을 맡았던 검사는 "피해 경찰관의 동료가 실탄 세발을 쐈고, 범인이 그 중 두발을 맞았다. 동료 경찰관이 쏜 실탄에 피해 경찰관이 사망한 거라고 주장하더라"고 했다.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이 돼 자칫 배심원들이 의심할 수도 있었다. 이에 검사는 결정적인 증거인 총알을 제시했다. 피해자 엑스레이 사진에는 오른쪽 가슴에 박힌 쇠구슬이 찍혀 있었다. 성병대의 총에 맞았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이를 본 성병대는 경찰이 조작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증인들은 지금 나를 피해망상으로 몰고 가려고 사전에 교육을 받았다"고 최후 진술을 했다.
아홉명의 국민 배심원은 4시간에 걸친 평의 끝에 만장일치로 유죄 의견을 전했다. 이에 재판부는 1심에서 성병대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성병대는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지만, 2심과 대법원의 판결도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성병대에게 무기징역 선고가 확정됐다.
[티브이데일리 최하나 기자 news@tvdaily.co.kr/사진=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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